본문 바로가기
in 드라마/베토벤 바이러스

[캡처스토리] '베토벤 바이러스' 나 강마에, 이제는 내려 놓아야 할 때…

by 하진다이어리 2008. 12. 3.

#1. 세상은 내가 변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말한다. 내 음악이 변했다고…
음악에 대한 해석이 더욱 깊어지고, 원숙해 졌다나~
그리고 감정을 억누르는 듯한 것이 없어지고 작곡가와 대화를 나누듯 작곡가 의도 속의 감정을 풍부화 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내겐 이런 사탕발림 같은 칭찬이 익숙하지 않다.

이젠 여기를 떠나 뮌헨 필로 가야 한다.
지휘자가 화려해 보이긴 하지만… 사실은 떠돌이 생활이거든.
난 늘 그렇게 살아왔다. 언제든 이곳에서 저곳으로…
또 그렇게 정처 없이 떠도는 게… 지휘자 인생이니까 그러려니 했었다.

그런데 이곳을 떠나는 나의 마음은 왜 이리도 허전한 걸까?
시향이 곧 해산할 것 같아서? 단원들이 그걸 막아보고자 철야 농성을 하고 있어서?
그래서 인 것 같지는 않다. 대체 뭘까?

마치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찾지 못해 놔두고 가는 듯하다.
그게 뭘까? 내게 그런 게 있기는 한 걸까?

#2. 난 루미가 강해지길 바란다

난, 루미가 집 앞에까지 오고도 차마 들어오지 못하고 돌아가는 걸 봤다.
사실… 내가 루미를 불러들일 수도 있었지만… 난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제 떠나면 또 언제 오려는지 기약할 수 없는데…
루미에게 작별 인사도 하지 않고 떠나고 싶진 않았다.
루미의 마음을 밀어낼 수밖에 없지만… 그 감정까지 부정할 순 없다.
난 루미에게 '토벤이가 보자는데'라는 말로 불러냈다.
내가 보자고 말하긴 쑥스럽잖아~

어디선가 카메라 셔터 소리가 들린다. 루미가 핸드폰으로 날 찍고 있다.
모르면 몰랐을까… 찍게 내버려두긴 너무 낯 간지럽지. 그래서 찍지 말라고 했다.
내 얼굴에 무슨 대단한 초상권이 붙은 스타도 아닌데 말이지…

루미란 이 녀석은 내가 그렇게 밀어냈는데도… 여전히 날 떠나고 있지 못하는 것 같다.
그것이 나에게 위로가 되는데… 이건 비밀이다.

뭔가 추억을 간직하고 싶어하는 루미. 내가 줄 것은 오래도록 끼고 다녔던 반지밖에 없다.
그걸 주긴 줘야 하는데… 그냥 '손 한번 내밀어 봐'라고는 하긴 좀 그렇고…
핸드폰 핑계를 댔다. 뭘 찍었나 검사한다고…

그리고 내 새끼손가락과 함께 내 음악 인생이 담긴 베토벤 생가에서 산 반지를 건넸다.
그 당시 한 끼 밥값밖에 없던 내가 돈 탁탁 털어서 산 그 반지는…
내가 강해지기 위해 산거였다.
그리고 지금은 루미가 그걸 받고 강해지길 바란다.

#3. 나는 과거형… 루미는 현재형

루미는 날 강당으로 이끌었다.
자기가 귀 먹어가며 공력을 키우기 위해 맨발로 진동을 느끼는 연습을 하는 곳이라고…
작곡 공부를 시작한 건 알았지만… 이런 것까지 할 줄은 몰랐다.
차가운 바닥에 엎드린 루미, 무슨 말이든 다 해보란다 알아들을 수 있다고…

강마에 "바닥에서 냉기 올라와. 입 돌아가고 싶어?"

루미 "루미야! 넌 어쩜 그렇게 이쁘니?"

강마에
 "해석 좀 제대로 하지!"

루미 "성격두 좋구… 맘에 들어!"

강마에 "자화자찬 타임이야?"

루미 "내가 하는 말도 딱딱 다 알아듣고…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다 들을 수 있겠어.
선생님! 이제… 진짜 얘기 좀 해 보세요."

(그래… 나도 사실은 하고 싶은 말이 있긴 해…
 아무리 루미가 내 맘을 잘 안다고 해도…
내가 심하게 몰아붙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거든)

강마에
"그때… 미워서 내친 게 아니라는 거… 알지?"

루미 "흔들리는 게 겁이 났을 뿐이야."

강마에 "근데 또 언제든 흔들릴 수 있는 거구! 그때마다 도망칠 수 없다는 거… 알아."

루미 "하지만 누구나 그렇게 조금씩 나아가는 거니까…"

강마에 "고마웠어."

루미 "고마워."

고맙다는 말은 꼭 하고 떠나고 싶었다.
루미는 '고마웠다'는 말을 '고마워'라고 이해했다.
결코, 과거의 일로 넘겨 버리고 싶지 않은 것처럼…

#4. 건우 이 녀석 또 일을 벌인다

이제 '마우스 필 오케스트라'를 운영할 수 없게 된 건우.
난 건우에게 분명히 수능 시험에서 1등급 받고…
대학 가서도 연주 활동 열심히 하면… 그러면 정식 제자로 삼아 준다고 했다.
그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체계적인 공부를 하라는 의미였다.
건우도 그 말을 알아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건우 이 녀석 또 공연을 한단다.
그것도 시향을 살리자고 시위하고 있는 단원들과 함께 합동 공연을…
게다가 나에게 지휘까지 해 달라고?

나 이제 겨우 무거운 짐을 덜고 떠나려고 하는데…
내가 여기 있어도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주기 힘든 상황이잖아.
그런데 건우란 놈은 또 무모한 공연을 하겠단다. 난 당연히 하지 말라고 했지.

예전에 교향악 페스티벌 실패한 거랑… 시향 잘린 거랑…
실패했던 많은 것들을 다시 상기시켜 주며 말렸다.

그러나 난 안다. 저 녀석이 그런 말로 포기하지 않으리란 걸.
또 실패하면… 또 단원들이 상처받을 텐데…
왜 굳이 그런 일을 벌이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다.

제일 두려운 건… 저들이 실패를 하는 한이 있어도 미리 포기하는 일은 없을 거란 거다.
건우 저 녀석이 날 또 심란하게 만든다.

#5. 내가 벌써 마의 징크스를 깬 거야? '오케스트라 킬러'의 아성이 무너진 거야?

건우… TV에서 애국가가 나올 때까지 안자고 옆에 붙어 있다.
이 녀석이 이렇게 굴땐…또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다.

아니나 달라. 또 날 설득하려 하고 있다.
시향을 살리는 공연에 지휘를 해 달라고 계속 조른다.
내 그럴 줄 알았다. 그래서 난 출국 날짜를 바꿔놨다.

쟤들이 공연하는 날… 난 여기 없어야 한다.
그래야 이곳을 떠날 수 있을 것만 같았거든.

건우는 내가 출국 날짜를 바꿔놨다는 얘기를 듣고서 꽤 실망한 것 같다.
그래도 이왕 마음먹은 거… 난 가야겠다.
조금만 더 지체하다간… 또 그들 꼬임에 넘어갈지 모르거든.

건우는 내 결심이 굳을 걸 받아들이는 모양이다.
당부의 말이 있다며… '오케스트라 킬러'란 소리를 듣지 말았으면 한단다.

그래 나도 그러려고 해. 이제부터는… 적어도 6개월은 넘길 거라구…
그런데… 나 이미 이 녀석들과 6개월을 넘겼단다.

나도 시간이 그렇게 많이 흐른 줄 몰랐다.
벌써 그렇게 됐었나? 나도 내가 나의 징크스를 깬 줄은 몰랐다.
게다가 '오케스트라 킬러'였던 내가 오합지졸 오케스트라를 깨지도 않았다.
난 이미 나의 마의 징크스를 두 개나 깼구나.

#6. 건우는 공연 중…

건우와 '마우스 필'은 시향을 살리기 위해 시민들의 동조를 얻고자 공연을 준비했다.
공연은 아마 잘 진행되고 있을 거다. 초반엔 좀 쉬운 곡으로 한다고 했으니까…
그동안 내가 가르친 데로 한다면 별 무리는 없을 거다.
그래! 난 그렇게 믿고 싶다. 반드시 잘 해낼 거다.

#7. 나도 정말 그냥 떠나려 했었다

난 일부러 건우가 일어나기 전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그 녀석과 눈이 마주치고… 또 한 번 설득을 당하면 나도 어찌 될지 몰라서…

난 공항으로 가고 있다. 그런데 플래카드가 눈에 띈다.
건우 녀석이 수재민들이 홍보를 도와줄 거란 얘기를 하긴 했지만…
플래카드가 거리를 도배하고… 많은 사람들이 나설 줄은 몰랐다.

게다가 왜 하필이면… 그때 그 수재민을 만날 건 뭐냔 말야…
내가 도망 가는 걸 알기라도 한 듯~ 그는 '어디가? 당신이 지휘자잖아…'라고 외친다.
아~ 내가 도망자인 거야?

그렇다고 여기서 멈출 순 없다. 꾹꾹 눌러 참고 공향으로 향했다.
그렇게 공항에 가서 비행기에만 오르면 돌아오고 싶어도 못 돌아오니까…
정말 그렇게 그냥 가려고 했다.
그 망할 놈의 건우의 문자만 아니었다면…

"선생님 벌서 가셨어요?? 마지막 인사도 못 드렸네요. 안녕히 가세요 선생님."

근데… 사실 그 내용은 그리 대단한 내용도 아니었다.
난 어쩌면 너무나도 간절히… 어떤 '핑계'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자그마한 핑계를 대고 난 결국 발길을 돌렸다.

#8. 어두운 긴 터널을 지나다

나, 지금 다시 단원들과 '합창'을 노래한다.
내가 삶이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삶을 포기하고 싶었을 때 들었던 그 구원의 '합창'을…
지금은 나의 단원들과 연주하고 노래한다.

타고난 천재가 아니었기엔… 내가 이만큼 오기까지 너무나도 힘들었다.
그리고 내 앞에서 연주하는 그들도 나와 다르지 않다.
나도 죽어라. 연습하고 또 연습하면 '명품'이 될 줄 믿었었다.
그리고 그들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걸 안다.

내가 오늘 출국을 미루고 여기 돌아와 이들과 함께 하는 이 시간이 앞으로 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나도 모르겠다.
이것이 그들을 위한 마지막 선물이 될지… 아니면 이들과 함께 할 시작이 될지…
그런 걸 굳이 생각하고 싶지 않다.

늘 원곡 그대로만 해석하는 나의 지휘는…
전통적 방식을 제대로 따르고 있다는 평가도 받았지만… 지루하고 따분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세상은 변하고 있었지만… 나만 변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내가… 저 오합지졸들을 만나며 '사람 냄새가 풍기는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었다는 걸…
나도 이제는 안다.
난 지금 막… 어둡고 긴 터널을 통과했다. 그 앞에 무엇이 날 기다리고 있을까?
날 기다리는 게 무엇이든… 두렵지 않다.
내 단원들이 '꿈'을 이룬 것처럼… 나도 그럴 거거든!